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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이치 야나기 츠키 × 오타니 노세이 대담 - 다른 세대의 아티스트에서 본 이치 야나기

一柳 慧 × 大谷 能生 対談 ー 異なる世代のアーティストからみた一柳 慧 ー

전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음악을 통해 항상 새로운 표현을 계속 추구하고 있는 이치야나기 씨.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와 친교를 가지면서 독자적인 표현 활동을 전개해, 탄생 80주년을 맞이한 현재도 여전히, 정력적으로 창작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한편 오오타니 노부 씨는, 고도 경제 성장을 거친 일본에 생을 받아, 마찬가지로 크로스 장르인 활동을 전개. 저서에서는 기록 미디어가 탄생해 이후 20세기 음악 비평에 대해 상징적으로 언급하는 등 사회와 음악의 관계에도 독자적인 시야를 가지고 있다.

이 세대는 다르지만 함께 동시대를 사는 2명의 음악가의 대담을 통해 그 시대 시대가 내포하고 있는 공기감과 함께 새로운 시점에서 일유혜상이 보일 것으로 기대하고 싶다.

오타니 노부 (이하 오타니 ) : 만나서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쪽(「아라자르 Vol.3」【하드코어·인디펜던트 비평지. Vol.2에서는 오타니 노조, Vol.3에서 일류 혜가 특집되고 있다】를 가리키고)로, 나, 이치야나기씨의 앞의 호로 인터뷰되고 있습니다. 매우 긴 인터뷰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대담의 이야기가 오기 전부터 이쪽은 읽어 주셨으므로.

이치야나기 : 아니, 그렇게 읽지 않는 것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웃음)

오타니 : 그리고 「일본의 전자 음악」이라는 책의 시작에 저도 관련되어 있어요. 몇 가지 인터뷰를 나도 갔다.


왼쪽:「아라자르」Vol.3 오른쪽「일본의 전자 음악」카와사키 히로지

이치야나기 : 하지만 그건 정말 깜짝 놀랄 것 같은 자세한 책이군요.

오타니 :일본의 전자 음악의 여명기, 즉 70년대까지, 어떤 작품이 태어나, 어떻게 수요되어 왔는가에 관해서, 우리가 조사 시작한 것은 1990년대입니다만, 그 무렵 거의 정리된 정보가 없고, 예를 들면 이치야나기씨의 「에로스+학살」 아카이브하고있었습니다. 드디어, 최근 10년 정도로, 50년대나 60년대의 정보가 나오고, 이렇게 실제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로스+학살」

■생(나마)의 음악/녹음된 음악

오타니 : 정확히 90년대 정도로, 나는 아직 20대였지만, 어쨌든 일본의 전위 음악을 듣고 싶을 때에, 음원의 재발도 아직 진행되지 않아, 들을 수 없었던 시기 길었어요.

이치야나기 :그렇네요, 90년대의 무렵까지는, 어느 쪽인가라고 하면 일본이 오른쪽 어깨 올랐던 탓도 있어, 생(나마)이 많았어요. 우리는 삶의 환경 속에서 계속 자라오고 있으므로, 반대로 지금이 잘 대응할 수 없는 곳도 있어.

오타니 :어머(웃음)

이치야나기 :그렇습니다(웃음)

오타니 :지금은 클래식의 음악가 분이라도, 음악을 생으로 파악하는 것보다는, 먼저 재생물로 듣는 감각이 굉장히 강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치야나기 : 지금은 그렇네요, 하지만 그것은 청각 감각의 퇴화를 초래하지 않습니까?
LP의 시대라고 하는 것이 잠시 있었습니다만, 조금 들었을 때에는 LP보다 CD 쪽이 음질이 클리어로 기뻐하고 있던 평론가일지도 있었습니다만, CD라고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즉, 귀에는 즐거울지도 모르지만, 어떤 식으로 연주되고 있는지 알 수 없어요. 예를 들어 바이올린을 연주 할 때 보잉을 어떻게 연주하고 있는지, 그런 세세한 것이 LP라고 들립니다. 지금도 유럽에 가면, 아직 CD보다 LP를 팔고 있는 가게가 상당히 있습니다. 일본은 우선 그러한 상황은 거의 없지요.

오타니 :그렇네요, CD도 팔리지 않게 되었다고 들었으니까요.

이치야나기 :그래도 아직 미국에 비하면 좋지만.

오타니 :미국은 거의 CD를 지금 팔지 않게 되어 있어요.
제가 그냥 CD세대에서 초등학생 때 미디어가 바뀌었어요. 그리고 30년 정도로 또 다른 미디어로 천천히 가는 상황이 되어 버린구나…

이치야나기 : 아니, 일본에서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지요. 우리 어릴 적은 어쨌든 전쟁의 흉터가 매우 컸기 때문에 물건이 거의 없어져 버렸다. 악기도 없고, 악보도 없다든가. 뭐,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음악을 하고 있는 인원수가 적었고,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무렵 있었던 홀의 수는 3개 정도예요.

오타니 :웃음
이치야나기:대홀은 히비야 공회당뿐이었으니까. 그래도, 오히려 홀이 적은 탓도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상당히 열기는 있었고, 항상 가득. 지금은 어쩌면 할 수 있어, 어떻게 내용을 묻어 가려고 하는 것이 빈소가 되어 버리고 있다. 우리 세대는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니까, 이 전환이라고 하는 것이, 좀처럼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요.

오타니 : 하지만 메우는 것이 힘들다는 것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드네요.

카즈야나기 :매우 이상해요. 대체로 이렇게 깨끗한 홀이 많이 있는 나라는 그 밖에 없으니까요. 이 사이에도 비엔나 필의 무리가 와서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무코 3년간의 오페라와 오케스트라의 콘서트의 표는 완전히 SOLD OUT라고 합니다.

오타니 : 오, 무코 3년?

이치야나기 : 하지만 하고 있는 곳이 모두 낡습니다. 내용을 소중히 하고 있으므로, 모차르트·자르라든지 슈베르트·자르라든지, 훌륭한 이름은 붙어 있습니다만, 홀은 정말로 이미 로프트 같은 곳에서 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오타니 : 새로 홀을 만들지 않네요.

이치야나기 :그쪽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네요.

오타니 : 그렇네요.
요 전날 「실험 공방전」에 다녀 왔습니다만, 실험 공방의 사람은 쇼와 51년부터 58년경에 활약되고 있어, 그냥, 그 시기에 거의 엇갈림 같은 형태로, 이치야나기씨는 NY에 걸려 느낌 이군요.

이치야나기 :그렇네요, 실험공방의 상승의 무렵은 거의 모르겠네요.

오타니 :지금의 세타가야 미술관이 있는 근처에서, 모두 걸어 친구의 집에 놀러 가고, 길에서 흥미가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친구가 되어, 작품을 교환한다고 하는 교류가 재미있다고 생각 (웃음)

이치야나기 :그렇네요, 걷고, 만나서 교류하는 것이 일상이었으니까요. 실험 공방에 조금 늦어, 평론가의 요시다 히데카즈씨가 시작한 「20세기 음악 연구소」라고 하는 것이 있어, 매년 장소를 바꾸어 페스티벌을 기획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페스티벌에서 처음으로 미국 의 음악을 연주하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 계기로, 나는 61년에 일본에 귀국했습니다.

오타니 : 그냥 요시다 히데카즈씨가 NY·유럽을 돌고 있었을 무렵이 53년 정도였지만, NY에서는 만나지 않았습니까.

이치야나기 : 조금 엇갈렸던 것 같네요. 하지만 소노다 타카히로 씨와 히로 토시로 씨를 만났습니다.

오타니 : 확실히 존 케이지가 유럽에 소개되는 타이밍이, 54~5년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치야나기 :그렇습니다, 54년이군요.

오타니 :요시다 히데카즈는, 케이지의 음악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 역시 상당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하는 식으로 쓰여졌네요.

이치야나기 : 그래, 맞아요. 그렇지만 54년경에 유럽 투어를 한 것으로, 상당히 저쪽의 사람도 열리고, 그 후 부레즈라든지 슈톡하우젠들과 곧 교류가 시작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동양과 서양 그 중간에 서서・・・

오타니 :일본에서는, 특히 이치야나기씨의 귀국과 동시에 케이지의 음악이 소개되는 것이지만, 아직 그 시기까지는, 현대 음악의 경우는 먼저 새로운 스쿨, 또는 새로운 메소드가 있다고 하는 시대가 남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역시 케이지의 음악을 무대상에서 연주할 때에, 새로운이라는 감각으로 파악되고 있었는지 어떤지, 또 관객이 어떤 감각으로 받아들였는지 등이, 자료를 읽고 있어도 모르고, 그 근처의 감각을 가르쳐 주셨으면합니다.

이치야나기 :그 시대라고 하는 것은, 음악을 목표로 하고 있는 사람도, 그 다음 관객의 사람도, 전쟁의 속에서 이른바 헝그리 정신이 벌고 있던 시대이므로, 그러한 의미에서는 일본도 지금부터 생각하면 드물게 열린 자유 한 시대였기 때문에 모두 관심이 높았습니다. 이것에 대해 가지 않으면 시대에 뒤쳐진다는 기분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다만, 유럽은, 적어도 음악의 점에서는, 그러한 받는 방법을 거의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네요.

1950년경부터 스즈키 오오츠키가 NY의 콜롬비아 대학에서 선을 가르쳤습니다만, 선이라고 하는 것은, 오오츠키의 말을 빌리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전부다.」 즉,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케이지의 음악은, 그것을 철학으로 하고 있어, 거기로부터 그래픽 스코어나 뭔가를 창조해 구체화했다. 그것은, 유럽의 사람에게 있어서는 처음에는 매우 알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생각하네요.

일본도, 전후에는 일본적인 것에 대한 반발이 꽤 있었으므로, 첨단적인 것에 대한 이상상이나 행그리 정신 같은 것은 있었지만, 오히려 그러한 일본적인 관점은 잘라내기에 가까운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서양과 동양을 어떻게 공존이나 상호 침투시킬 수 있을까, 라고 하는 입장에 서 버린 것이니까, 좀처럼 선 일근과 같이는 철저히 할 수 없었군요.

오타니 : 그 때 케이지의 음악이라고 하는 것은, 미국 음악으로서 일본에 소개되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선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는 정보 또는 인상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의 청중은 어느 정도 받았습니까.

이치야나기 :이것은 나의 인식입니다만, 케이지를 제일 오래전부터 소중한 작곡가라고 하는 것으로, 문장을 쓰거나, 교류도 하고 있던 평론가의 아키야마 구니하루씨와 나는, 아무래도 지금 말했다 한 점에서는 이야기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있었습니다.

오타니 : 그 근처 좀 더… (웃음)

이치야나기 :아키야마씨는, 일본적인 것, 선적인 것등을 완전하게 배제한 유럽의 전위적인 관점으로부터의 케이지를 평가하고 있었군요. 나는 아무래도, 그것만으로는 조금 다른 것이 아닐까…. 나는 케이지의 제자라는 것이지만, 그의 방식은 함께 행동하고, 함께 음악회를하고, 함께 작곡을 도와주며, 더욱 삶도 자주 함께라고 하는 형태로, 그의 생각하고 있는 일의 일단에 이쪽도 들어가는 교육이었던 것이기 때문에, 보통의 음악 교육과는 다른 환경에 그와 함께 있었던 가운데, 역시 일본의 문제라고 하는 것은 중요하다 라는 인식이 점점 깊어졌습니다.

오타니 : 봐요. 그것은 역시, 이치야나기씨가 미국으로 옮겨져, 그쪽에서 본 일본이라고 하는 거리의 잡는 방법이, 그 시기에 싹트고 와서라는 것이었습니까?

이치야나기 : 맞습니다.

오타니 : 아키야마 쿠니 하루 씨의 당시의 비평을 읽고 있으면, 「양악을 받아들인다」라고 하는 것 대단한 욕심스러운 의식이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이치야나기 :그렇네요, 그것은 소중한 일로, 해 주셔서 매우 좋았습니다만, 나는 상당히 오랫동안 일본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구미와는 다른 일본의 문화 예술의 사고방식이나 특징에 관심을 깊게 하고 있어 한 것도 사실입니다.

오타니 :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면 「일본의 것이다」라고 오는 감각이, 60년대 당시에는 충격적이었다는 느낌이 문장에도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문헌을 읽고 있으면, 케이지를 「동양 사상에 근거한다」라고 하는 대잡파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만, 일본의 청취자에 대해서 확실히, 선이라든지 공안【선종 에 있어서 수행자가 깨달음을 열기 위한 가제로서 주어지는 문제의 일]이라고 하는 어필은 하고 있지 않았던 것일까… 라고 하는 감촉을 받았습니다만.

이치야나기 :일본의 사회는 세로 나누기 때문에, 예술과 생활이 유리하고 있는 탓일지도 모르겠네요. 미국에서는 선도 생활의 일부로 파악되고 있기 때문에.
케이지가 62년에 처음 일본에 왔을 때, 우선 말한 것은, 스즈키 오오츠키에게 가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마쿠라의 히가시 게이지에 데려갔습니다만, 그 당시 오오조는 92세였지만 매우 활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저것은 뭐라고 할까… 케이지가, 완전하게…

오타니 : 「스승… !」같은 느낌으로 (웃음)

이치야나기 :그래 그렇게 「스승!!」이라고 느끼고(웃음) 그리고, 대졸은 당당하고 있었습니다. 영어도 물론 페라페라이고. 여담이지만, 거기에 가서 제일 놀랐던 것은군요, 20대 중반의 대단한 미녀가, 대졸의 비서와 같은 느낌이었어요. 「이것은 누구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만, 12세부터 오오츠키의 선에 경도해, 오오오츠키가 일본에 돌아올 때에 함께 온 분이라고 합니다.

오타니 : 오!

이치야나기 : 지금, 아직 계십니다. 오지 마, 50 년 만에 교토에서 만났습니다. 지금도 매우 미녀이지만 힘든 분입니다 (웃음)

이치야나기 :케이지에게 있어서는 대졸로부터 배운 여러가지 것을, 자신의 음악에 도입해, 그 후의 작품에 모두 그것이 투영되고 있다고 하는 느낌이니까, 우선 제일에 만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때가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오오츠키는 96세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에.

■ 시대가 준 영향

오타니 :케이지는 청년기가 대불황의 시대이며, 어린 시절의 이야기 등을 듣고 있으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작곡가를 목표로 하고, 셰인베르크에 가서, 그 사이 여러가지 발견을 통해서 오졸의 선을 접한다는 흐름이 있다 라고 생각합니다만, 마찬가지로 이치야나기씨 때에도, 50년대 후반의 NY라고 하는 것과, 60년대의 일본이라고 하는 시대 속에서, 미국의 줄리어드 음악원에 다니고, 케이지라는 존재를 만나, 그리고 또 일본으로 돌아온다는 흐름 속에서 거기서 공부된 것에 대한 시대의 영향이나 그 당시의 에피소드와 같은 것이 있으면 듣고 싶습니다만.

이치야나기 :미국의 음악계라고 하는 것은, 일본에서 말하는 악단(오케스트라·오페라·음악 학교)과, 대학 부속의 음악부, 그리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프리랜서의 사람들, 이 3개가 분명히 나뉘어져 있어요.
예를 들면 일본이라면, 타케만씨는 70~80곡 정도 영화 음악을 만들고 있고, 황씨나 하야미코씨도 많이 만들고 있어, 어떤 의미에서 특정의 감독과의 연결도 매우 강하다. 하지만, 예를 들면 할리우드인 그만큼의 영화가 만들어져 있어도, 한번 영화 쪽에 발을 디딘 작곡가는, 라쿠단이나 대학 교수에 맞이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그 정도 분명히 예술 음악과 구별, 혹은 차별하고 있군요.

오타니 :아카데믹한 것과 인기있는 것의 구별, 즉 어떤 종류의 히에랄키라는 것이 분명하고 있었다고. 50년대 무렵일까요?

이치야나기 :50년대도 물론 그렇네요. 지금 말하면, 예를 들어 스티브 라이히가 최근 일본에 왔습니다만, 그는 절대 오케스트라 플레이어는 사용하지 않지요. 그러니까,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의 그룹으로 하고 있군요. 그것은 그래서 프리랜서에서도 성립하는 사회가 생겨나네요.

오타니 : 마스·커닝햄의 댄스 컴퍼니라고 하는 것도 독립한 컴퍼니로서 흥행을 실시하고 있었습니까?

이치야나기 :나는 댄스의 내정이라고 하는 것은 잘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댄스도, 캐닝햄은 모던 댄스로, 그 전에 모던 발레가 있거나라든지, 그 후에는 컨템포러리 댄스라든지.

오타니 : 모던 댄스는 마사 그레이엄의 곳이군요.

이치야나기 :그렇습니다, 꽤 세분화되어 있지요.

오타니 : 그레이엄까지는 아직 클래식 음악의 사람이 사용되고 있었습니까.

이치야나기 :당시의, 주로 미국의 현대 음악의 작곡가들이군요.

오타니 :영화와 함께, 컨템포러리 댄스에 대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라쿠단 또는 대학의 사람이라도 하지 않았습니까?

이치야나기 : 댄스는 어땠을까. 그렇지만, 조금이군요.
내 인상에서 현대 댄스 사람들은 현대 작곡가의 음악을 사용하고 춤과 음악이 같은 시대를 걷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오타니 :영화에 비하면 스테이지 예술이라고 하는 것 어느 정도는 인정되고 있었습니까.

이치야나기 :댄스는 음악이나 연극과 나란히 있어, 저희에서는 퍼포먼스 아트의 중요한 일관이라고 말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댄스는 새롭지만 그 음악은 클래식이나 대중이 사용되는 최근의 경향에, 나는 약간 위화감을 기억하네요.

오타니 :이치야나기씨는 미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이, 줄리아드 음악원으로부터입니다만, 라쿠단에 들어가자는 의식이 다소는 있었습니까.

이치야나기 :아니, 나는 어쨌든 NY에 가고 싶다는 기분이 있어, 외국인이라면 비자를 위해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고 안돼요.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학교였기 때문에. 하지만 거의 학교는 가지 않았다 (웃음)

오타니 : 과연 (웃음)

이치야나기 :NY 전체가 학교같은 거리니까요. 그리고 또 하나는 줄리어드에게 12음 기법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오타니 : 어! 그래요...!

이치야나기 : 그래. 그래서 그 자세에서 보아도 알겠습니다만, 특히 프리랜서의 사람들은 배제되고 있었습니다.

오타니 : 미국에서도 그렇네요. 유럽 쪽에서 그런 이야기는 잘 기분입니다만…
그런 가운데, 줄리아드의 방향보다는 프리의 작곡가로서 해 가는 결심을 받은 것은, 일본에 돌아오기 전 무엇입니까?

이치야나기 : 저는 줄리어드에 들어갔을 때부터 12음 기법을 이용해 곡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줄리아드에서는 피아노만은 제대로 했죠.

오타니 : 피아니스트로서의 방향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나요?

이치야나기 : 역시 아무래도 작곡 쪽에 중점이 걸리고 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걸리지 않네요.

오타니 : 봐요. 원래 작곡을 공부하고자 유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치야나기 : 네. 이것도 나쁜 의미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역시 연주가라고 하는 것은 꽤 선수와 닮은 곳이 있어…

오타니 :네(웃음)

이치야나기 : 왜 하고 있는지, 그런 것은 거의 묻지 않아요.

오타니 :그렇네요, 플레이어는 곡을 생각하지 않아도 연주하고 있으니까요, 기본적으로는.

이치야나기 : 맞습니다.
오타니씨의 CD《Jazz Abstractions》, 저것은 매우 재미있네요. 지금도 저것은 라이브로 먹고 계십니까?


《Jazz Abstractions》

오타니 :《Jazz Abstractions》는 거의 콜라주로, 기존 음원을 사용해 여러가지 정리한 음악입니다. 저는 색소폰 플레이어이므로, 생연주의 재즈 라이브도 하고 있다고 하는 형태로, 몇개인가 엉망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래도 씁니다. 무대와 극판 같은 일이 잘 오기 때문에, 그 때마다 여러가지 궁리해 음악을 붙인다는 일과, 이른바 블랙·뮤직의 인기 음악으로서의 흐름 속의 재즈, 서울, HIPHOP과 같은 음악과 , 그리고는 인프로바이저로서 일렉트로닉스와 색소폰으로 연주한다고 하는 즉흥 연주, 그러한 장르로 하고 있습니다.

이치야나기 :언제나 멤버라든지 인원수는 정해져 있습니까?

오타니 :자신의 밴드만 3명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고정으로 나머지는 가거나 와서 여러가지로… 요전날은 붉은 벽돌 창고에서 무도의 무로후시 코우씨와 함께 짜서, 무로부시씨의 무용과 나의 음악으로 작품을 만들거나라든지.

이치야나기 : 그런 것은 즐겁고 좋네요. 그러면 꽤 오리지널 형태로 활동하고 있네요.

오타니 :그렇네요, 열심히 해 나가려고 합니다(웃음)

■ 블랙 뮤직과의 접점

오타니 :50년대라면, 특히 NY에서는 모던 재즈가 제일 분위기가 온 타이밍이었을까 생각합니다만, 재즈의 비밥의 사운드라고 하는 것은, 당시, 이치야나기씨의 귀에는 어떻게 들려 계셨습니까?

이치야나기 : 가끔, NY에 있는 빌리지 게이트라든가, 빌리지 뱅가드 같은 곳에 가고는 있었습니다만, 거기에 갈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이, 케이지와 함께 하고 있던 튜도어입니다. 그가 그런 곳에서 연주회를 하고 있어.

오타니 : 튜도어가! ?

이치야나기 :실은, 케이지에 제일 먼저 정식에 있던 것은, 빌리지 뱅가드였어요.

오타니 : 빌리지 뱅가드였나요! !

이치야나기 :58년경, 빌리지 뱅가드에서 튜도어가 리사이틀을 했어요. 물론 그때까지 그곳에서는 그런 음악을 아무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계기로 조금 출입하기 쉬워졌어요. 단지 나에게의 영향이라고 하는 것은, 그쪽에 별로 시간이 갈 수 없어서. 왜냐하면, 그 무렵은 미국이 거의 유일한 전승국으로, 유럽으로부터 매우 많은 음악가가 흘러 와서, 그러한 사람들과의 교제가 많았다고 하는 것이 있네요. 그러니까 나는 어느 쪽인가라고 하면, 재즈보다 60년대에 들어간 후에, 락의 쪽과 현대 음악이군요(웃음)

오타니 :《오페라 요코오 타다노리를 노래》라든지군요.


《이치야나기 료곡 오페라 요코오 타다노리를 노래》

이치야나기 :말로는, 락도 재즈도 프로그레시브라고 하는 말을 사용하지요?

오타니 : 재즈 쪽에서는, 프로그레시브라는 말이 일순간, 예를 들어 스탠 켄턴의 후반이라든가, 써드 스트림【클래식과의 융합을 도모한 재즈의 무브먼트】라는 말과 거의 같은 느낌으로, 건서・슈라라든가 프로그레시브 재즈라고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결국 정착하지 않았네요.

이치야나기 : 봐요. 세실 테일러는 어떤 식으로 형용됩니까?

오타니 : 세실 테일러는 나가기 시작할 무렵 프로그레시브 재즈라는 구석으로 잡혔습니다. 라고 하는 말이 되어, 그 때에 프로그레시브 재즈라는 말이가 버려져 버렸다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치야나기 : 봐요.

오타니 : 50년대 중반부터 후반, 어느 쪽인가라고 하면 어레인지를 확실히 중시해, 앙상블로, 12음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는, 현대 음악과 재즈의 융합 같은 형태가 그 무렵 쵸코쵸코로 오고 있어, 그것은 어느 쪽인가 하면 , 유럽측으로부터 취해 간 재즈의 이미지라고 하는 인상이 강했네요.

블랙 뮤직의 관점에서 말하면, 이른바 미국의 인기 음악인 스윙 뮤직이라는 것이 확실히 있다고 해서, 1940년대부터 50년대에 걸쳐 즉흥 연주가 주체로, 서로 싸우는 배틀성이 강한 비밥이라는 음악이 왔다고 생각합니다만, 50년대의 미국에서, 그 2개의 차이라고 하는 것을, 인식한 경험등은 있습니까.

이치야나기 : 음, 그 무렵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특히 미술의 사람들이나 무용가와의 교제가 많았던 것으로, 반대로 음악 쪽은 조금 수박이 되어 있었어요.

오타니 : 과연 (웃음)

이치야나기 :그것과, 이것은 조금 순조롭게 의식한 데서는 아닙니다만, 아까 말했듯이, 아무래도 각 음악에는 테두리가 있었으므로, 그러한 것을 미술이라고 하는 것은 뛰어넘어 차례차례로 새로운 것을 낳고 있고, 프리랜서의 음악가들이, 그쪽으로부터의 영향을 엄청 받고 있었습니다.
오타니: 그렇네요, 잭슨 폴록의 최성기이기도 하고요.

이치야나기 : 맞습니다.

■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것

이치야나기 :지금 일본의 젊은 사람들은, 비율과 오타니씨가 하고 계시는 것 같은 방법에 가깝다고 할까… 그렇다고 해도 타카하시 유우지씨도 그렇죠.

오타니 : 아, 알겠습니다.

이치 야나기 : 다음 달 개최하는 콘서트 [도쿄 문화 회관에서 이치 야나기 씨의 탄생 80 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되는 콘서트]에서 그에게도 출연해 주겠지만, 그도 지금의 오타니 씨의 바쁜 닮아, 것 굉장히 바빠요. 무용가와는 하고 있는, 시인과는 하고 있다, 벌써, 여러가지 사람들과 하고 있고, 지극히 정신 상태도 좋은 것 같습니다. 즐거워 보인다.


"이치야나기 혜 80th FESTA!" 플라이어

오타니 : 컴포저 플레이어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분은 여러 사람과 할 기회가 늘어나는 것은 건강에 좋다고 할까 (웃음)

이치야나기 : 그래, 그렇다고 생각해요.

오타니 : 대체로 어떤 장르 속에서만 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 내 세대에서도 많고, 나도 아카데믹한 교육은 제대로 받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연극이라든지 문학의 사람이라든가 라고 할 수밖에 장소가 없다고 하는 일도 있고.

이치야나기 : 하지만 그런 방법이라고 하는 것은, 열려 갈 가능성이 매우 있다고 생각하네요.

오타니 :그렇네요, 역시 재미있을 것 같은 사람과 하는 것이 기본이 되기 때문에.

이치야나기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분업화되어 전부 세로 나누어져 버리는 것, 그것과 시스템이 매우 탄탄해져 온 것. 그것은 메리트도 있는 것은 있는데, 역시 그 때문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장소가 매우 한정되어 버렸다는 것이 있죠.

오타니 : 그건 당연한 것 같아요.

이치야나기 : 그래.

오타니 :플레이어에서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재즈의 사람도 그렇습니다만, 동세대의 클래식의 사람은 전혀 붙어 주지 않는다고 할까… 연극과 댄스의 장면이 비교적 최근 몇 년 매우 재미있고, 그런 곳에 여러 사람이 관여하면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이치야나기 :연극도 그렇고, 무용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게 되면 좋지만, 몇 안 되는 퍼포밍 아츠 중에서, 음악만이 조금, 매우 열심히. 모두 굉장히 능숙하지만, 조금 전처럼 선수 적으로 되어 융통성이 없어지고 있다는 곳은 있지요.
그동안 미와 마미히로 씨도 만났습니다. 그도 이른바 음악계에서 조금 시프트해 온 것 같아.

오타니 : 과연, 시프트 해왔다.

이치야나기 :야나기 미와의 「도쿄 로즈」를 보았을 때에 만났습니다만, 그녀(야나기 미와씨)도 미술로부터 연극으로 시프트했다고 듣고 조금 놀랐습니다만.

오타니 :지금 제일 연극이, 믹스트 미디어로 여러가지 가능성이 아직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면 역시 함께 하고 싶어집니다만, 50~60년대의 NY의 그런 느낌이 역시 굉장히 있었다 ?

이치야나기 : 그런 분위기에 가까웠다고 생각하네요.
단지, 내가 조금 놀랐던 것은, 61년에 돌아왔을 무렵이라고 하는 것은, 장소는 한정되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쿠사츠키 아트 센터」라고 하는 것이 있고, 그런 의미에서는 저기 그냥 정말 자유 였어요.

오타니 : 여러가지 이야기는 듣고 있습니다. 자료를 보면 샘 프랜시스의 회화가 있다고 한다.

이치야나기 :전의 초월 홀이라고 하는 것은 한쪽이 샘 프랜시스로 한쪽이 마츄인가. 그 꿈이 다시 일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만.

오타니 : 그렇네요. 이야기에 듣고 있으면, 이렇게 여러가지 일을 해도 좋다고 말한다.

이치야나기 :그렇네요, 저것은 정말로, 신기했어요.

오타니 : 초월은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가득한가요?

이치야나기 : 오히려 60년대 초반이 활발했어요.
지금, 미국으로부터 하면 60년대의 문의가 옵니다. 각 학교에서 아카이브를 만들거나 그래픽적인 것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기 위해서, 60년대의 것이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을 불러 연주회를 하거나 하고 있습니다.

오타니 :아마, 전세계적으로 60년대부터 70년대 초두라고 하는 것은, 흥미가 높아지고 있지요. 실험 공방전이라든지 의외로 사람이 오고 있는 것 같고. 오지 않아도 테이프 음악 재현 콘서트도 하고 있어, 만원이었지요.

■ 이치야나기 작품에 대하여 — 서양의 지혜와 동양의 지혜, 그것을 상호 침투시키는 것

오타니 :이번 여러가지 자료를 빌려서 다시 듣고 받았습니다만, 「천년의 울림」의 생각 ―대불 개안까지 돌아가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감각―이라든지, 또, 이쪽의 앨범《교향곡 제8번-리버레이션 2011》도, 매우 청취가 있어, 서양적인 것의 시간을 만드는 방법과, 동양적인 것의 파악의 방법을, 섞는 것은 아니고…

이치야나기 : 시간과 공간을 서로 침투시키는가?

오타니 : 네.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듣고 있었습니다만, 여러가지 듣고 가는 가운데, 다양한 감각에 대해 있는 시간, 문화에 대해 있는 시간 등, 몇 종류의 감각이 다른 시간이 있어, 그것을 하나의 작품에 침투시킨다는 것을 계속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게 느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법으로 행해지고 있는지, 또, 동양적인 시간의 파악이라고 하는 것을 오선보에 기록해, 그것을 처음으로 플레이어가 읽을 때의 교환에 관한 지금까지의 경험 등도, 이야기해 주시면 기뻐요.


좌:《천년의 울림》 우:《교향곡 제8번—리버레이션 2011》

이치야나기 : 확실히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시간의 요소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시간으로 음악을 생각한다고 하는 구조는, 역시 아무래도 서양적인 것에 지배된다. 그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고, 그들(서양의 사람)에게 있어서의 오랜 필연성 아래에 확립된 것이며, 또 그것이 여러가지 의미로 부서지거나 빗나가면서 전진해 온 곳은 있습니다만 .
예를 들어, 일본인이 가지고 있는 무상관이라고 하는 것은, 그다지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잠재 의식적으로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서양적인 단어로 한 번 대체하지 않으면 서양의 사람들에게는 무엇을 알 수 없습니다.

동양 혹은 일본의, 예능적인 것도 포함한 것의 본연의 자세가, 선생님이 제자에게 가르친다는 것을 통해서 매우 감각적으로 물건을 처리한다고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만, 그것을 한 번, 감각의 레벨이 아니고, 좀 더 철학이라든지 논리라든지 배경으로 바꾸어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 그것이 메이지 이래 서양이 일본에 가르쳐 준 하나의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의식이 높아지면 지금까지의 모호함이 모호하지 않게 된다.

오타니 :선생님·제자라는 형태가 아니라, 넓게 텍스트로서 밖에서 모두가 그것을 읽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할까…

이치야나기 :내가 기본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시간과 동시에 공간도 상호 침투시킨다고 하는 것. 이것은, 나는 어느 쪽인가라고 하면 일본의 건축이라든가 정원이라든지 그런 것으로부터 배웠군요. 매우 훌륭하게 시간과 공간 모두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음악으로 전환할 수 있으면 어떻게 될까라고 생각해 하고 있네요.

이치야나기 :저는 특히 유럽권의 나라에 갔을 때에, 강의나 토크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을 때, 언제나 서투른 영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지만, 영어로 하면, 애매한 부분을 제대로 정리해 설명해야 하지 않고, 어떻게든 저쪽 사람에게 전할 수 있도록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으로, 반대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에도 연결된다.

오타니 :일본인끼리라도, 태어나 자라가 다르면 하나씩 상대에게 알 수 있도록 말을 바꾸면서 말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지만, 그러한 감각이 빠져 오면 살벌로 되어 버릴까, 역시 서로 상대의 말 에서 말하는 연습을 제대로 해 나가는 것은 매우 소중하네요.

이치야나기 :그리고는 역시 자연과의 맞붙는 방법이라고 할까, 특히 일본은 매우 현저하게 그것이 시간에 투영되고 있다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네요.

오타니 : 그렇네요. 저도 텍스트에 쓰고 굳어 버리면 그것을 그 나라에 가져가 거기에서도 똑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이 유럽 문명이 발명한 대단한 곳이라고 생각하네요. 게다가 음악은 신체 안에서 말할 수 있어 (악보라는 형태로) 사람에게 건네줄 수 있는 대발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공죄”는, 죄 쪽보다 공 쪽이 아마 컸다고 생각합니다 입니다.

쓰고, 읽고, 그것을 모두 고쳐서, 같이 몸에서 한번 분리한 것을 다시 한번 연주할 때, 읽는 작업이 클래식에서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클래식 음악의 경우라면 종이에 쓰여진 것이 작품이라는 감각이 플레이어에게도 강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이치야나기 :교육이 그런 식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오타니 : 그 주변은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하지 않는 형태로 음악을 파악하는 방법을 할 수 있을까요?

이치야나기 : 상당히 많은 음악을 공부하는 사람이 일본에 머무르지 않고 외국에 가는 건가요? “공죄”라는 것은 바로 그대로로 음악이나 미술 같은 말을 그대로 표현에 사용하지 않는 분야는 그 물건이 가지고 있는 것에서 발상한다는 설득력=구체적인 것을 가져야 한다. 라고 생각합니다. 아까 비엔나의 무리가 저쪽에 3년간 티켓이 품절이라고 말했습니다만, 그 무리의 연습의 방법을 들으면, 그것이 잘 알 수 있어요. 대화하거나 상담하거나 여러가지 소리로 성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타니 : 완전히 구체적인군요.

이치야나기 :말의 힘을 빌리지 않는, 소리의 실체라든지 실재성이군요.

오타니 :그것이 있던 뒤에서의 종이의 교환이, 당연하게 된다고 하는 것이군요. 일본의 경우는, 그것이 없는 채로 종이를 사용해 합니다.

이치야나기 : 맞습니다. 거기의 갭이 있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오타니 :저는, 재즈 플레이어입니다만, 재즈 뮤직의 장소에서는 사람 각각의 고유의 음색이 없으면 하는 의미가 없다고 하는 가운데, 수제로 만들어 가는 것이 몹시 매력입니다. 그렇지만 역시 재즈도 이미 가르치는 것이 되어 있어, 대학의 공부 속에도 들어가 있어, 「즉흥 연주라고 하는 것은, 이럴 때에는 이런 스케일을 사용합니다」같다. 그러한 교육을 보고 있으면 별로 매력이…

이치야나기 : 일본악이라도 그렇지요. 점점 유럽 음악에 들러오는 감각이 있네요.

오타니 :구체적이 아니게 되어 버리면 전혀 재미없게 되어 버립니다 군요.

이치야나기 : 맞습니다.
아니, 이번 꼭, 생을. 또 기회가 있으면 들려주거나 보여주고 싶습니다.

오타니 :요코하마에서 조금 뵙고 하고 있으므로, 꼭, 잘 부탁합니다.

TEXT:이노우에 아키코 PHOTO:니시노 마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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