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쿠라덴과 연고의 땅-번외편
13명의 합의제에 이름을 올려놓지는 않았지만, 헤이케 토벌, 가마쿠라 막부 성립에 공헌을 한 많은 인물이 있습니다. 이번은, 번외편으로서, 13명 이외의 인물에도 초점을 맞추고, 가나가와현내의 연고의 땅을 소개합니다.
1명째는 도이 실평(도이사네히라).
히라씨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거병한 요시나가가, 「이시바시산의 싸움」으로 패주했을 때, 도모사를 도운 것이 도이 실평입니다. 그 충절로부터 겐토요 아침의 신임을 얻어, 헤이케 토벌 때에는 가마쿠라군의 봉행이나 요시비 삼국이나 나가토·주방의 수호에도 맡겨질 정도였습니다. 1191년 11월에 사망했다(제설 있음)라고 합니다만, 만약 존명이라면, 13명의 장로격으로서 참획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명소 1 조간지
쇼간지 📍〒259-0305
명소 2 고쇼 신사
고쇼 신사 259-0304
두 번째는 하타야마 시게타다(하타케야마시게다).
그 교양의 높이, 무용, 인품으로부터 「사카토 무사의 감」이라고 말해진 인물입니다. 모토요리 아침이 거병했을 때, 헤이케방으로서 요미조군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 후, 신종하여 원요리 조방이 되어, 헤이케 토벌·유럽 정벌 등에서 큰 공적을 꼽습니다. 그리고 그 청렴결백한 인품도 어우러져, 「사카토부사의 감」과 누구로부터도 한눈에 두는 혼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하타야마 시게타다조차 가마쿠라의 정쟁에 부응없이 휘말려 마지막은 모반의 죄를 입혀 현재 요코하마시 아사히구 근처에서 호죠 요시시에 의해 토벌되었습니다.
스폿 1 쓰루가미네·니타마가와 고전장
하타야마 시게타다의 아이인 시게호(시게야스)가 호조 시마사의 후처인 마키 쪽의 딸 사위인 히라가 토모사와 술자리에서 찬사를 받은 것을 마키가 원망하고, 호조시마사에 하타야마 시게타다를 성패하라고 호조 마사코나 요시시는 「하타야마 시게타다가 모리를 일으킬 리가 없다」라고 반대합니다만, 최종적으로 삼대 장군 겐실 아침은 하타야마 시게타다 토벌의 명령을 내리고 합니다. 그 무렵, 하타야마 시게타다는 "가마쿠라에 이변이 있었기 때문에 지급해졌고"라는 연락을 받고, 거성인 무사시국 스가야에서 가마쿠라로 향하는 도중이었습니다. 그리고, 하타야마 시게타다군은, 가마쿠라를 나온 토벌군(대장·호조 요시)과 쓰루가미네·니타마가와(현재의 요코하마시 아사히구)에서 합전이 되었습니다. 불과 100기의 하타야마 시게타다군은 수만의 가마쿠라군을 상대로 분전하지만, 중과적하지 않고, 마지막은 일족으로 자해하고 끝났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카토부 무사의 감인 하타야마 시게타다는 토벌당했지만, 많은 사카토부사의 불만을 사고, 후에 호조 시세이·마키 쪽은 가마쿠라로부터 추방되는 큰 요인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쓰루가미네・니타마가와고전장터 📍〒〒241-0021
몇번에 걸쳐 「가마쿠라전」에 연고가 있는 가나가와현내의 스포트를 소개했습니다.
가마쿠라 시대는 정치의 중심으로서, 메이지 이후는 문명 개화의 상징으로서, 가나가와현에는 역사를 관여해 온 많은 장소가 있습니다.
역사를 느끼는 명소·구적을 방문해 가나가와의 다양한 매력을 느껴 보지 않겠습니까.
※기재하고 있는 칼럼의 내용에는, 여러가지 설 있는 것을 신청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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